내 가장 오래된 프로그래밍 기억

$\newcommand{\argmin}{\mathop{\mathrm{argmin}}\limits}$ $\newcommand{\argmax}{\mathop{\mathrm{argmax}}\limits}$

초등학교 1 학년이었던가? 아무튼 저학년이었던 것은 확실하다. 컴퓨터 선생님이셨는지 담임 선생님이셨는지 아님 둘 다였는지 확실하게 기억나지 않는다. 아마 담임 선생님이셨던 것 같다. 어느날 선생님이 컴퓨터실에서 화면 상의 글자를 예쁘게 치장하는 방법을 알려주셨다. “HTML 태그”라는 것이었다.

꺾쇠로 시작하고 꺾쇠로 끝나는 것 사이에 무슨 뜻인지 알지도 못하는 영어 단어를 적어넣고 글자 양 옆으로 배치하면 글자가 굵어지기도, 기울어지기도, 심지어는 무지개빛으로 변하기도 했다.

지금 생각해보면 정규 교과에는 그런 진도가 없었는데. 선생님이 웹 개발에 경험이 있으셨던걸까. 감사하면서도 생각할수록 궁금증이 많아지는 대목이다.

아무튼, “HTML 태그”를 접하고 나를 포함한 학생들을 가장 재미나게 했던 첫 대상은 “마퀴 태그”라는 것이었다. 얼마나 재미나서 여기저기 써먹었는지 당최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아직도 “marquee”라는 스펠링이 똑똑히 기억난다.1 겨우 글자 생김새만 바꾸었던 앞서 배웠던 시시한 “태그” 녀석들과는 달리, 이 녀석은 글자를 살아 움직이게 했었다. 당최 마퀴라는게 무슨 뜻인지 몰랐던 나는 ‘글자가 움직이는 마법을 부려서 마귀인가?’ 하는 생각을 했었다.

선생님은 자비롭게도 학급 홈페이지에 태그를 연습할 수 있는 게시판을 만들어주셨고 아이들은 신이 나서 수업 시간에는 배우지 않았던 온갖 태그를 연습했다. 처음엔 글 내용에만 태그를 달다가 글을 클릭하지 않아도 태그가 보이도록 제목에도 태그를 달기 시작했다. (당연하게도?) 당시 학급 홈페이지는 상당히 허술했던 터라 제목에 태그를 달면 게시글 목록에서 이 방향 저 방향으로 날아다니는 형형색색의 제목들을 볼 수 있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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애석하게도 화면 속 글자가 통통 튀기고 커지고 작아지고 뱅뱅 회전하는 것 만으로는 아이들의 흥미를 유지하기 어려웠다. 나를 포함한 짖궂은 아이들은 곧 이 “태그”를 사용해서 더 짜릿한 결과를 보고싶어했다. 우리가 찾은 두 번째 대상은 “폭탄 태그”라는 것이었다. 이 녀석은 이름부터 마귀보다도 흉악했는데, 바로 이 태그가 쓰인 웹페이지를 본 사람의 브라우저를 날려버리는 태그였던 것이다.

브라우저를 날려버리는 방법도 가지각색이었다. 어떤 태그는 좀 더 솔직했다. 시작부터 다짜고짜 윈도우 경고창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띄워버렸다. 성능이 안 좋은 컴퓨터는 경고창을 뱉어내다 결국 뻗어버리기도 했다. 반면 어떤 태그는 좀 더 교묘했다. 어쩌면 랜섬웨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, 이 쪽은 웹페이지 왼쪽을 클릭하라는 둥 요구를 해왔고 교묘하게도 요구하는 바를 들어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굴었다. 하지만 결국엔 브라우저를 주저앉혀버렸다.

본디 폭탄 태그는 흥미로운 제목을 적고 그 제목에 낚인 사람들의 브라우저를 한 순간에 터뜨려버리는 데에 그 묘미가 있는 법인데 (아니다. 다른 사람의 웹서핑을 존중하자.) 문제는 조악했던 학급 웹페이지와 맞물리며 더 커졌다. 몇몇 사명감 넘치는 웹 테러리스트들이 제목에 폭탄태그를 넣어버렸던 것이다. 놀랍지 않게도 게시판은 폭탄 태그마저 렌더링해버렸고 곧 학급 웹페이지는 접근 불가능한 폭탄 태그들의 구렁이 되어버렸다..

꼬맹이 웹 테러리스트들을 보다 못한 선생님은 결국 “태그 금지령”을 내렸다. 한 시대가 저물어가는 순간이었다. (이것도 사실 그렇지 않다. 한 시대라 할 만큼 장엄하지 않았다.)

그 이후에도 테러를 기도했던 광신도들이 있었지만 이내 웹페이지가 제목 태그를 렌더링하지 않게 수정되며 모든 소요는 잦아들었다.

이 모든 일이 일주일도 안 되는 기간에 일어났다. 짧은 기간이기도 했고 시시하게 막을 내렸기에 금방 기억에서 잊혀졌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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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모든게 아득해져갈 때 쯤, 여전히 HTML에 관심있던 친구가 웹 개발 카페에서 한 글을 찾아 보여주었다. 사랑의 달콤함에 대한 장문의 내용이 주절주절 써져있는 글이었는데, 분명 글 도입부에 “사랑해”라고 쓰여있던 단어가 장문의 글을 다 읽고 다시 스크롤을 올려보면 “사탕해”로 바뀌어 있었다.

문득 폭탄범의 기억들이 스쳐지나가며 화려하지도, 그렇지만 해롭지도 않은 “태그”에 조용히 감탄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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프로그래밍이라기보단 웹 디자인에 가까운 영역이지만.

내가 기억하고 있는 줄도 몰랐던, 잠결에 문득 떠오른 내 가장 오래된 코딩 기억이다.


  1. 지금도 웹 개발에서 쓰이려나 싶어 빠르게 검색해보았다. 이제는 브라우저에서 지원하지 않을 수도 있는 기능이라고 한다. 운이 좋다면 링크를 따라 가면 marquee로 구현된 움직이는 텍스트를 볼 수 있다.